2. 마리 퀴리


마리퀴리(Marie Curie)하면 초등학교시절 퀴리 부인으로 위인전 한번쯤은 읽어봤을거고 ,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이라 추앙받는 퀴리부인이라 할정도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고 

프랑스 저명인사들만 묻힌다는 판테온에 안장되었으며

유로화 쓰기전 프랑스 제일 고액권 5백 프랑화에 초상이 인쇄되었던,

여성중에 가장 인류에 공헌한 사람이라고 할수있겠다.

 

이젠 퀴리부인이라 부르지 않고, 마리 퀴리로만 나오던데 뜬금없지만, 그만큼 강해진 여성파워에 실감한다. 

그 위인전 뒷부분에는 안나오던 불륜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상황까지 가던 마리 퀴리를 알아보자.


 

 

 

 

 

<피에르 퀴리와 마리퀴리>

 

 

 


마리와 피에르, 폴란드계 유태인이며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성 물리학 박사였던 마리는 여덟살 많은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 3년후 어느날 라듐을 발견하는데...

라듐의 발견으로 피에르는 노벨물리학상의 후보로 추천! 근데 이 첫 번째 노벨상 수상에서 마리는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런게 어딨어! 울 마누라가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데!!! 울마누라 이름 안넣어주면 나 노벨상 안받을거야!!”


피에르는 마리의 공동수상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03년 노벨물리학상은 피에르 퀴리, 마리퀴리, 앙리 베크렐 세사람이 공동 수상하게된다.

부부는 행복했고 두딸은 잘자라주었으며, 연구는 인정받았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행복은 오래 가지 않고,

 

불륜의 주인공 피에르의 제자 폴 랑주뱅이 나온다.

 

폴은 유능한 제자였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연구에 있어서는 특출난 성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이론을 깔끔하게 정리잘하는 밑에 두고 호구로 부려먹기 좋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폴과 마리는 남편제자와 사모님 관계일 뿐이었는데...


1906년 5월 7일, 복잡한 길을 지나던 피에르는 짐마차 바퀴에 깔려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피에르의 나이 마흔일곱, 마리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11년간 부부이자, 동료이며 친구였던 피에르와 마리였기에 피에르의 갑작스런 죽음에 마리는 오열하며 힘든 나날을 보낸다. 마음의 구멍이 너무 컸던 마리를 위로해주던 폴에게 마리는 상실감을 달래려 하다 그만 눈이 맞게된다.

 


 

이둘은 사랑하게 되지만, 문제는 이둘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용납될수없는 사랑이란 것이다.

 

 

 

스승의 여자라서? 남편의 제자라서?

 

 

 

그게 아니라 문제는 폴이 유부남이었다.

 

 

연구밖에 모르고 피에르와 진실로 사랑했던 마리도 늦바람이 불어 적극적으로 불륜을 즐기며 아파트까지 구해 밀회를 한다. 그러다 폴의 마누라한테 걸렸다.

 

 


 


<제 1회 솔베이회의, 앉아서 턱괴고있는 여자가 마리퀴리, 사진 맨 오른쪽이 폴 랑주뱅이다. 그옆은 아인슈타인>

 

 

 


 

 이런 상황에서 1911년 마리는 노벨화학상 수상 결정이 났는데... 

폴의 마누라가 마리가 폴에게 쓴편지와 함께, 불륜의 전말을 일간지 뢰브르에 보내어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당연히 신문에 대서특필되면 프랑스는 뒤집어졌다.

 

 


 

“유태인년이 착실한 프랑스유부남을 꼬셨다!”

 

“가정파괴범 퀴리!”

 

 


 

이쯤되자 앞이 무서워진 폴은 얼른 가정으로 돌아간다.

졸지에 언론의 까발림당하고 남자에겐 버림받은 마리...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도 마리에 대한 노벨상을 다시생각하게 된다.

 

 


 

“아...상을 주자니 그렇고 안주자니 또 그렇고...”

 

“근데 준다했다 뺏을수도 없잖아 불륜이랑 과학이랑 무슨상관이야??”

 

 


 

어쨌든 마리는 1903년에 이어 1911년에 다시한번 노벨상을 받는다.

하지만 국가의 명예이건만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녀가 노벨상의 권위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했으니...

 


 

본문과는 상관없으나 퀴리집안에서 노벨상은 또있다. 

큰딸 이렌느와 사위가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아서 2대에 걸쳐 부부가 노벨상을 받았고

그리고 자기 어머니 퀴리부인이라는 전기를 쓴 둘째딸 이브퀴리는 2차세계대전당시 전쟁특파원으로 활약하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 사무총장 특별 보좌관을 했으며 그의 남편은 유니세프 대표로 노벨평화상까지 타니 노벨상 4개나 받은 어마어마한집안이다.

 

 

 

 

<이브 퀴리>

 


 

이브 퀴리는 이런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우리집안의 수치입니다. "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남편 모두 노벨상을 받았는데 저만 못받았거든요.”

 

 

 

북대서양 조약기구 사무총장 보좌관한 사람이 정말 저런말했으면 우리들은 다 부끄러워 죽으라는 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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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소피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부활’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대문호! 

책은 안읽어봤어도 최소한 제목 정도를 알고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며, 마누라 소피아는 3대 악처로도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마누라가 얼마나 싫었으면 여든둘 노구를 이끌고 가출해서 객사했을까 할텐데,

소피아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뭐야? 객사할만한 이유라고? 흥분말고 일단 좀 들어보자



 

<톨스토이와 소피아, 톨스토이가 죽기 두달전 사진>


 


 

 작품만 보면 톨스토이는 천재라고 할수있을텐데, 젊은 시절 톨스토이는 개였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하녀들과 놀고 다니며 도박과 여자에 환장했었다.

(톨스토이가 여자에 집착했던 것은 바로 두 살때 어머니를 잃는 바람에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보통남자들이 부러워할만한 20대를 흘려보낸 톨스토이는 30대가 되자 슬슬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는데...

 


 

“야 남자는 결혼을 해야 사람이 되는거야. 난 이쁜 마누라 만나서 너무행복하다. 너도 얼른 장가가라”


궁정 의사였던 친구가 톨스토이를 결혼하라고 바람넣었다.

그러던중..

 

톨스토이가 반한 여자가 있었으니!


톨스토이를 한눈에 반하게 만든 주인공은 그 친구의 딸이었다.

친구는 처음에 나이차때문에 반대했지만 톨스토이의 끈질긴 구혼으로 7일만에 

18살 민증에 잉크도 안마른... 아니 민증도 안나온 딸을 서른넷에게 넘겨주게 되는데, 이때가 1862년 9월 23일이었다.


서른넷의 톨스토이와 아직 아징 창창한 18세의 소피아...

 

심지어 톨스토이는 당시 아들도 하나 있었다. 

물론 법적 혼인으로 얻은 아들이 아니고 자기 메이드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였지만, 톨스토이의 아들이었다.


16살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톨스토이는 부부사이에 비밀이 없어야 한다며 서로에게 일기장을 보여주자고 제안하고, 신부에게 자신의 15년치 일기장을 건넨다.


물론 취지는 훌륭했다. 일기장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바람직한 부부상을 꿈꾸자했었는데 오래가진 못했다. 

 

왜냐?

 

술마시고 도박하고 여자만난 걸 적을수는 없으니 아내가 보는 일기와 자신만의 비밀일기 두 개의 일기를 쓰게된다.

뭐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어린 신부는 그렇게 교환일기를 하게되는데 일기장에는 젊은 시절 여자와 도박에 빠져 살던 톨스토이의 행적이 쭈욱 적혀있었다.


서른넷의 톨스토이에게 지나간 추억 정도로 치부할수있겠지만 열여덟 때 묻지않은 소녀에게는 그 일기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중 일기라서 그나마 공개용이었을텐데)

결국 톨스토이의 일기장은 어린신부에게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켰다.


거기다 톨스토이는 쉴새없이 잠자리를 가져 무려 열세명의 아이들을 낳게되었다. 

 

뭐 부부 금술이 좋아 애를 많이 낳았다는데 누가 뭐라겠나. 게다가 둘다 ㅅㅌㅊ집안이어서 돈걱정도 안해도 되는데...

근데 문제는 톨스토이가 모성애에 대한 집착이 강해 유모를 들이지않겠다는 완강한 고집이었다. 

당시 귀족들이나 나름 먹고살만한 집에서는 유모를 부르는게 상식이었는데 배꺼질날 없고 젖마를날없는 소피아는 슬슬 화가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원래 허약하게 태어난건지는 모르나 열세명 자식중에 여섯은 어려서 죽게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톨스토이는 끊임없이 소피아에게 잠자리를 요구했고 유모는 반대했다.

여기까지였으면 소피아도 그냥저냥 버티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돈은 많겠다. 시간도 많겠다. 애들 키우는낙으로라도 산다면야... 그러나


“헤이~ 여보달링자기마누라 이거 내가 이번에 쓴작품이야”

“전쟁과 평화... 엄청 두껍네... 근데 설마....”

“응... 자기가 교정좀 봐줘^^”

“........”


천재는 악필이라고 했던가? 대문호 톨스토이의 원고는 사람이 읽을수없을 정도의 악필이었다. 

이 악필을 사람이 볼수있게 교정하는일은 언제나 소피아의 일이었다. 

 

육아와 교정 작업까지 떠맡은 소피아... 그래도 나름 내조하며 현모양처로 살아갈려고도 애썼다.

남편의 성격이 모난건 시애미가 일찍 세상떴기때문이고 글씨는 못써도 글은 잘쓰니까... 

유모 못쓰게하는건 모정에 굶주렸던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이해할수도 있지,라고 마인드 컨트롤이라도 하지않았을까..

근데 드디어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터지고 한방 날릴만한 일이 생긴다.


“사유재산을 가진다는게 말이되나? 우리는 지금 농민들을 착취하는거야 난 재산을 모두 환원하겠어!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농부가 되는거야 날 따르라 소피아!”

“................ 이 죽일놈이 진짜.......”


그 후 쫓겨난 톨스토이는 객사한다.


지주생활을 청산하고,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었겠지만,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온(그나마 귀족같이 살지도 못했다, 고생만 하고) 소피아에겐 봉창두드리는 소리가 아닐수없다. 

그동안 악처라고 욕 많이 먹어왔었지만 소피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톨스토이도 결코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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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184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이주민들이 서부로 끝없이 밀려들어가는 

서부영화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골드러쉬... 다들 들어는 봤을거다

근데 금이 원래 한사람의 것이었다는거 알고 있나

골드러쉬를 촉발시킨 한 남자의 파란만장하고도 슬픈 인생을 한번 알아보자.


 

<요한 아우구스트 수터, 정확한 발음은 '서터'>


19세기 초반 스위스.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던 요한 아우구스트 수터는 사업아다들이 대개 그렇듯 쫄딱 말아먹고 실업자가 된다. 

거기에 파산, 신용불량, 어음위조, 절도 혐의까지 뒤집어 쓰면서 마누라와 세 아들을 버려두고 프랑스로 도망간다.


당시 유럽의 기층민들에게 미국은 신천지였다. 

공짜로 땅을 나눠주고 노력한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나라! 수터도 미국행을 결심한다.


1834년 7월 7일, 위조신분증을 파서 미국행 배를 탄 수터의 나이 서른한살.

뉴욕에 도착해 짐꾼부터 약장수, 술장사 가리지않고 일해 종잣돈을 모으게된다. 

그리고 이 종잣돈으로 음식점 겸 여관을 하는데 매일같이 뉴욕항으로 밀려오는 이민자들로 가게는 대박이 터진다.


어느정도 돈을 번 수터는 또 미주리에 농지를 사서 민박을 경영... 

이 민박집은 서부로 건너가는 자들의 경유지로 위치선정이 기가막힌곳이었다.

 


 

“아무나 갈수있는곳이라면 난 서부로 안갔을것이다.”

“남자라면 로망이지. 서부에 로망이 있다.”

 


 

개나소나 몰려드는 서부에 관심없던 수터도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솔깃해지고 

미국온지 3년째되는 1837년, 전재산을 처분하고 서부로 간다. 

근데 막상 석달동안 개고생해서가보니 서부가 썰들은거만큼 멋지지 않은것이다.


벤쿠버 요새에서 갈피를 못잡던 수터는 캘리포니아로 목적지를 돌리는데.. 이당시 캘리포니아는 멕시코 영토였다.

(1864 미국vs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이 이김으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주가 된다)


수터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새크라멘토에 도달한다.

새크라멘토는 하늘이 내려준 비옥한 땅이었다. 


 

<새크라멘토 위치>



수터는 그길로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몬테레이로 달려가 주지사인 알베라도와 독대한다.


“새크라멘토가 좋은 땅은 맞는데, 거기다 뭐할라고?”

“내 왕국을 건설할거임”

“뭐라는겨???”

“이민자들을 데려와서 하나의 작은 이민자 왕국을 세울거다!! 이름도 노이 헬베티엔(Neu-Helvetien) 새로운 스위스란 뜻이야, 멋지지?

“ㅋㅋㅋ 그래 니 맘대로 해봐


주지사 알베라도는 수터에게 10년간의 독점적 특허권을 인정해줬다. 

솔직히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거든 황무지땅을 외국자본과 인력을 끌어와 개발한다는데 주지사 입장에선 남는 장사였다.

 


 

1839년 수터는 스위스 남자 몇명과 일잘하는 카나카 원주민 150여명, 가축을 이끌고 새크라멘토에 뿌리를 내린다. 

수터는 아주 열심히 개척하겠다고 굳은결의로 왔는데, 왠걸, 땅도 좋고 기후도 좋은 덕분에 아주 땅짚고 헤엄치기식으로 농사가 잘되는거다



 

 


곡식과 가축이 순식간에 늘어나고 수터는 자신의 왕국에서 재배한 식품들을 밴쿠버와 샌드위치 섬, 캘리포니아에 정박하는 배들에게 납품하기 시작.

캘리포니아에 정박한 배들은 장기간의 항해에 대비해 식량을 구하는데 그수요를 모두 채워줄수있는건 수터뿐이었고

게다가 신선하기까지 하니 사업은 뭐 말할것도 없이 잘됐다.

선원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제공하려 시작한 과일농사는 씨만뿌리고 나무만 심어도 알아서 자라니 오늘날 캘리포니아산 과일의 시초가 된다.

돈이 모이자 노이 헬베티엔에 사람이 몰려들고 운하가 건설되면 정말 하나의 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쯤되니 미국에 도착한지 14년만에 가족들이 생각나 이곳으로 오라며 편지를 보낸다.

이제 정말 고생끝의 낙이 온다 생각했고 결정적으로 미국이 멕시코와 다이다이떠서 멕시코를 몰아내고 캘리포니아를 점령하니 수터의 마지막남은 불안감이 해결됐다.

하지만 이남자를 위해 태어난 말 새옹지마...


꼭두새벽... 제재소 일꾼하나가 노란 알갱이를 보이며.. 제재소 터를 닦으려고 땅을 파다 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금맥인지 확인하러 인부들과 운하를 막고 채로 몇 번 모래를 걸렀는데 ...

금이 비상식적으로 쉽게 많이 나오는것이다...


수터는 자기땅에서 금이 나오니 흥분했으나 가라앉히고 비밀리에 채굴할 계획을 세우지만 

인부새끼 하나가 금덩이를 인증하며 이야기를 푸는바람에 비밀은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게된다.


첫 번째 재앙으로 일꾼들이 일을 안하고 금캐는데 신경이 팔리니 가축들은 죽어자빠지고 곡식은 썩어 넘어졌다. 금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일꾼들은 통제가 안되니 자기땅 권리 주장해봤자 수터의 말은 개소리로 흘릴뿐이다..

 

 


 

 


 


근데 아직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문제는 이제 본격적인 골드러쉬가 몰려오는거다

전신기를 통해 전파돈 금발견 소식은 미국을 넘어 대서양 건너 유럽까지 전해진다.



 


우리집 앞마당에서 석유나온다고 동네사람들 타지사람들 전부 우리집 몰려와서 개판만들면 개빡치는건 당연지사.

하지만 이제 너무나도 많이 몰려들어와 수습이 안된다. (25만여명이라 카더라)


"여긴 합법적인 내땅이야! 꺼져!" 외쳐도 허공의 메아리...

그는 완전히 망해버렸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혈혈단신으로 알프스 넘어 미국에와서 자신의 왕국을 만든 사람인데...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다시 재기하려한다.


다시 농사를 시작한 수터... 때마침 그의 가족들은 미국에 도착하는데...

14년동안 버려지고 이제사 성공했다고 연락해서 왔건만... 쫄딱 망해있네???


"당신 성공했다며!! 이게뭐야?“

“아니...성공했었는데... 금이 나오는 바람에...”

“뭔 개소리야... 금이 나왔으면 더 성공을해야지 장난쳐?”


노령에 먼길을 와서일까? 망한 남편을 보고 충격을 먹어서일까?.. 

마누라는 새크라멘토에 도착하고 얼마 안있어 죽고만다.

더더욱 수터는 복수의 칼을 갈며 다시 왕국을 재건하러 하고

전세계에서 몰려든 금사냥꾼들이 채들고 개울바닥을 헤집을때 아들들과 함께 다시 농사짓고 가축을 키워 재기에 성공한다.


이제 다시 먹고살만해지자 수터는 큰아들을 워싱턴 고시촌으로 보내 법공부를 하게한다.

소송을 하려면 큰돈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돈을 모은것이다.

그렇게 미합중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에 들어가는데... 

(도로,다리,운하 등 시설 사용료 2200만불, 무단으로 금을 채취한거 배상금 2500만불  총합 4700만불을 소송걸었다)


주지사에게 10년간 독점 특허권을 허가받고 다리,댐,운하,도로까지 건설하여 개척한 수터가 유리한 입장이었다. 

정부는 지금도 4700만불이면 어마어마한데 그당시 천문학적인 액수이기에 수터가 지쳐 떨어지길 고대하며 시간만 끌었지만, 수터는 농장에서 나오는수익금을 탈탈털어 소송에 투자했다.


4년동안의 소송간에도 수터는 떨어져나가지 않고 정부도 달리 수를 찾지못하자 법적으로 수터의 주장이 옳고 그의 권리가 보호되어야하는게 맞다며 1855년 드디어 승소하게된다.


 

“이땅은 원고인 수터의 땅이 맞고 연방정부는 배상을 해주고, 원고땅에 비비고 앉은 1만 7,221가구는 당장 퇴거하쇼. 판결 끝! 땅땅땅!”


수터와 아들들은 옳커니 만세! 신났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왜?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하루아침에 주거지를 뺏긴 주민들이 폭도로 변해 법원으로 달려들고 수터와 아들들을 쫓았다. 

장남은 폭도들에게 쫓기다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

둘째는 붙잡혀서 살해. 

셋째는 간신히 도망쳐서 집으로 몰래 가는길에 물에 빠져죽었다


더구나 수터가 재건한 땅은 다시 강탈당하고 불바다가 되었으며 수터는 또 혼자 살아남았다. 

악에바쳐 다시 수터는 소송에 들어갈 준비를하며 25년간 워싱턴의회와 법률 사무실을 오가며 노력했지만 1880년 6월 17일 수터는 가혹한 인생을 마감한다. 


영화와 소설에서는 모험과 낭만으로 그려졌던 골드러시지만 이면에는 철저하게 짓밟힌 한 인간의 삶도 있었다고 기억해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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