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돌고 돈다는 이야기가 있다.

 

5~10년전 유행했던 부츠컷, 나팔바지등에 샤기컷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불킥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당시에는 그보다 멋진 패션은 없었다.

 

그러면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 70년대의 패션은 얼마나 촌스러웠는지 알아볼까?

 

 

 

 

 

 


70년대 패션이라고 촌스러울지 알았는데

 

요즘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워싱된 스키니청바지에 주위 여자들을 봐도 그렇게 촌스럽단 느낌은 없다.

 

 

그 와중에 남자 다리길이  쩐다... 

 

 

 

 

 

 

1970년대하면 디스코와 함께 나팔바지 많이 떠올리는데..

 

사실 남자는 티셔츠와 청바지

 

여자는 미니스커트와 핫팬츠를 입고다니고

 

요즘처럼 통굽구두가 유행했다고한다.

 

 

 

 

 


또 이당시에는 장발하면 삭발당하거나

 

미니스커트 입으면 경범죄로 처벌받던 시절이다.

 

 

 

 

 


이렇게만 봐서는 요즘인것 같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시대를 느낄수 없는 사진이다. 

 

 

 

 

 

옷스타일과 구두, 헤어스타일도 요즘못지않다.

 

 

 

 

우리가 지금 입은 패션들도

 

다 돌고돈다.

 

부끄러워 했던 부츠컷팬츠와 샤기컷 헤어가 언젠간 돌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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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같이 돈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종일 뒹굴며 놀수 있는 이유가 뭘까

돈없고 춥고 배고파도 천원짜리 한장이면 배부를수 있는 라면이 있기 때문이겠지?

 

이 추운날 집 안에서 라면 한 그릇 할 때마다

 

이 라면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하고 궁금해 한적 없어?



 

 


사실 인스턴트 이전의 라면 최초 발상지는 여러 설이 있으나

 

현재 가장 유력한 것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이 전투식량으로 먹기위해

말린 밀가루 반죽의 면을 휴대하고 다녔는데,


 중국군 시체에서 일본군이 이것을 발견하였고,

후에 이것에 아이디어를 얻어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나가사키의 난킨쵸에서 탄생해 그 레시피가 일본 각지에 퍼졌다. 라고...

 

어쨋든 태평양전쟁 종전 10년후, 어느덧 일본인들도 본래 생활을 시작할때에 즈음

 

이것을 인스턴트면으로 언제든지 쉽게 먹을수 없을까하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안자이 모모호쿠로, 현재 유명한 닛신식품의 창업자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최초로 인스턴트화시킨 라면

 

1958년 8월 25일 닛신 에서 출시한 "치킨 라멘" 이다!

 

사실 여러 맛을 시도해 보았으나 '치킨'맛을 첨가하니 가장 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상품화한다.





 


 


또 후에 계량을 거듭해, 자외선에 의해 제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투명한 비닐부분을 점점 줄여간다

 

참고로 이 당시 출시된 모든라면들은 별첨된 스프없이 면 자체에 맛이 베어져 있는 것들이다.

 

당연히 보존상에 있어 불리할수 밖에 없었다.



 


 


당시 불티나게 팔리던 닛신의 치킨라멘을 보고 난리난 재벌가들은

 

너도나도 라면을 상품화한다, 오죽하면 당시 라면 만드는 메이커가 100개가 넘었다

위 라면은 묘조식품의 아지츠키라면이다.

 

심지어 라면 포장지도 닛신 제품과 똑같이 출시했으나

특허관련 소송후 모두 없어진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종전 약 10년뒤 식량수급문제가 정말 심각하였다.

이것을 보고 일본에서 맛 보았던

 

인스턴트 라면을 한국에 상품화하여 식량난을 해결할수 없을까 고민한 사람이 한국에도 있었으니




 

 

바로 전중윤 회장으로, 삼양식품의 창업자이다.

 

닛신의 치킨라멘 따라 같이 라면사업에 뛰어든 묘조식품에게 라면 기술을 전수받기위해

 

바짓가랑이붙잡고 한 달간 매달려 마지막 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전

 

알려주지 않았던 스프배합 비율이 적힌 족지를 전중윤 회장에게 건네준건 유명한 일화다.



 

 


 


 


그리하여 한국에도 치킨맛을 베이스로한 삼양라면이 등장하였고

 

당시 단 돈 10원이라는 가격에 판매를 하였고 전중윤 회장은

 

국민들의 허기짐을 달래야 한다며 이를 고수했었다




 



사진상의 전중윤 회장님은 2014년 7월에 별세하셨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삼양라면 첫 출시때 팔리지 않고 쌓여 있는 제고를 바라보며

 

"이것은 짜고 매운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니 고춧가루를 더 넣으시오"

라고 전중윤 회장에게 조언하였고 그 뒤 삼양라면은

 

불티나게 팔리며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라면업계 1위를 한다.


 

 


이후 우지파동때문에 1위에서 내려 앉았다는 소리가 있으나

 

이미 삼양라면은 우지파동 수년전 부터 농심에게 1위를 뺏기고 무너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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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184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이주민들이 서부로 끝없이 밀려들어가는 

서부영화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골드러쉬... 다들 들어는 봤을거다

근데 금이 원래 한사람의 것이었다는거 알고 있나

골드러쉬를 촉발시킨 한 남자의 파란만장하고도 슬픈 인생을 한번 알아보자.


 

<요한 아우구스트 수터, 정확한 발음은 '서터'>


19세기 초반 스위스.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던 요한 아우구스트 수터는 사업아다들이 대개 그렇듯 쫄딱 말아먹고 실업자가 된다. 

거기에 파산, 신용불량, 어음위조, 절도 혐의까지 뒤집어 쓰면서 마누라와 세 아들을 버려두고 프랑스로 도망간다.


당시 유럽의 기층민들에게 미국은 신천지였다. 

공짜로 땅을 나눠주고 노력한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나라! 수터도 미국행을 결심한다.


1834년 7월 7일, 위조신분증을 파서 미국행 배를 탄 수터의 나이 서른한살.

뉴욕에 도착해 짐꾼부터 약장수, 술장사 가리지않고 일해 종잣돈을 모으게된다. 

그리고 이 종잣돈으로 음식점 겸 여관을 하는데 매일같이 뉴욕항으로 밀려오는 이민자들로 가게는 대박이 터진다.


어느정도 돈을 번 수터는 또 미주리에 농지를 사서 민박을 경영... 

이 민박집은 서부로 건너가는 자들의 경유지로 위치선정이 기가막힌곳이었다.

 


 

“아무나 갈수있는곳이라면 난 서부로 안갔을것이다.”

“남자라면 로망이지. 서부에 로망이 있다.”

 


 

개나소나 몰려드는 서부에 관심없던 수터도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솔깃해지고 

미국온지 3년째되는 1837년, 전재산을 처분하고 서부로 간다. 

근데 막상 석달동안 개고생해서가보니 서부가 썰들은거만큼 멋지지 않은것이다.


벤쿠버 요새에서 갈피를 못잡던 수터는 캘리포니아로 목적지를 돌리는데.. 이당시 캘리포니아는 멕시코 영토였다.

(1864 미국vs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이 이김으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주가 된다)


수터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새크라멘토에 도달한다.

새크라멘토는 하늘이 내려준 비옥한 땅이었다. 


 

<새크라멘토 위치>



수터는 그길로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몬테레이로 달려가 주지사인 알베라도와 독대한다.


“새크라멘토가 좋은 땅은 맞는데, 거기다 뭐할라고?”

“내 왕국을 건설할거임”

“뭐라는겨???”

“이민자들을 데려와서 하나의 작은 이민자 왕국을 세울거다!! 이름도 노이 헬베티엔(Neu-Helvetien) 새로운 스위스란 뜻이야, 멋지지?

“ㅋㅋㅋ 그래 니 맘대로 해봐


주지사 알베라도는 수터에게 10년간의 독점적 특허권을 인정해줬다. 

솔직히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거든 황무지땅을 외국자본과 인력을 끌어와 개발한다는데 주지사 입장에선 남는 장사였다.

 


 

1839년 수터는 스위스 남자 몇명과 일잘하는 카나카 원주민 150여명, 가축을 이끌고 새크라멘토에 뿌리를 내린다. 

수터는 아주 열심히 개척하겠다고 굳은결의로 왔는데, 왠걸, 땅도 좋고 기후도 좋은 덕분에 아주 땅짚고 헤엄치기식으로 농사가 잘되는거다



 

 


곡식과 가축이 순식간에 늘어나고 수터는 자신의 왕국에서 재배한 식품들을 밴쿠버와 샌드위치 섬, 캘리포니아에 정박하는 배들에게 납품하기 시작.

캘리포니아에 정박한 배들은 장기간의 항해에 대비해 식량을 구하는데 그수요를 모두 채워줄수있는건 수터뿐이었고

게다가 신선하기까지 하니 사업은 뭐 말할것도 없이 잘됐다.

선원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제공하려 시작한 과일농사는 씨만뿌리고 나무만 심어도 알아서 자라니 오늘날 캘리포니아산 과일의 시초가 된다.

돈이 모이자 노이 헬베티엔에 사람이 몰려들고 운하가 건설되면 정말 하나의 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쯤되니 미국에 도착한지 14년만에 가족들이 생각나 이곳으로 오라며 편지를 보낸다.

이제 정말 고생끝의 낙이 온다 생각했고 결정적으로 미국이 멕시코와 다이다이떠서 멕시코를 몰아내고 캘리포니아를 점령하니 수터의 마지막남은 불안감이 해결됐다.

하지만 이남자를 위해 태어난 말 새옹지마...


꼭두새벽... 제재소 일꾼하나가 노란 알갱이를 보이며.. 제재소 터를 닦으려고 땅을 파다 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금맥인지 확인하러 인부들과 운하를 막고 채로 몇 번 모래를 걸렀는데 ...

금이 비상식적으로 쉽게 많이 나오는것이다...


수터는 자기땅에서 금이 나오니 흥분했으나 가라앉히고 비밀리에 채굴할 계획을 세우지만 

인부새끼 하나가 금덩이를 인증하며 이야기를 푸는바람에 비밀은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게된다.


첫 번째 재앙으로 일꾼들이 일을 안하고 금캐는데 신경이 팔리니 가축들은 죽어자빠지고 곡식은 썩어 넘어졌다. 금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일꾼들은 통제가 안되니 자기땅 권리 주장해봤자 수터의 말은 개소리로 흘릴뿐이다..

 

 


 

 


 


근데 아직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문제는 이제 본격적인 골드러쉬가 몰려오는거다

전신기를 통해 전파돈 금발견 소식은 미국을 넘어 대서양 건너 유럽까지 전해진다.



 


우리집 앞마당에서 석유나온다고 동네사람들 타지사람들 전부 우리집 몰려와서 개판만들면 개빡치는건 당연지사.

하지만 이제 너무나도 많이 몰려들어와 수습이 안된다. (25만여명이라 카더라)


"여긴 합법적인 내땅이야! 꺼져!" 외쳐도 허공의 메아리...

그는 완전히 망해버렸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혈혈단신으로 알프스 넘어 미국에와서 자신의 왕국을 만든 사람인데...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다시 재기하려한다.


다시 농사를 시작한 수터... 때마침 그의 가족들은 미국에 도착하는데...

14년동안 버려지고 이제사 성공했다고 연락해서 왔건만... 쫄딱 망해있네???


"당신 성공했다며!! 이게뭐야?“

“아니...성공했었는데... 금이 나오는 바람에...”

“뭔 개소리야... 금이 나왔으면 더 성공을해야지 장난쳐?”


노령에 먼길을 와서일까? 망한 남편을 보고 충격을 먹어서일까?.. 

마누라는 새크라멘토에 도착하고 얼마 안있어 죽고만다.

더더욱 수터는 복수의 칼을 갈며 다시 왕국을 재건하러 하고

전세계에서 몰려든 금사냥꾼들이 채들고 개울바닥을 헤집을때 아들들과 함께 다시 농사짓고 가축을 키워 재기에 성공한다.


이제 다시 먹고살만해지자 수터는 큰아들을 워싱턴 고시촌으로 보내 법공부를 하게한다.

소송을 하려면 큰돈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돈을 모은것이다.

그렇게 미합중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에 들어가는데... 

(도로,다리,운하 등 시설 사용료 2200만불, 무단으로 금을 채취한거 배상금 2500만불  총합 4700만불을 소송걸었다)


주지사에게 10년간 독점 특허권을 허가받고 다리,댐,운하,도로까지 건설하여 개척한 수터가 유리한 입장이었다. 

정부는 지금도 4700만불이면 어마어마한데 그당시 천문학적인 액수이기에 수터가 지쳐 떨어지길 고대하며 시간만 끌었지만, 수터는 농장에서 나오는수익금을 탈탈털어 소송에 투자했다.


4년동안의 소송간에도 수터는 떨어져나가지 않고 정부도 달리 수를 찾지못하자 법적으로 수터의 주장이 옳고 그의 권리가 보호되어야하는게 맞다며 1855년 드디어 승소하게된다.


 

“이땅은 원고인 수터의 땅이 맞고 연방정부는 배상을 해주고, 원고땅에 비비고 앉은 1만 7,221가구는 당장 퇴거하쇼. 판결 끝! 땅땅땅!”


수터와 아들들은 옳커니 만세! 신났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왜?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하루아침에 주거지를 뺏긴 주민들이 폭도로 변해 법원으로 달려들고 수터와 아들들을 쫓았다. 

장남은 폭도들에게 쫓기다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

둘째는 붙잡혀서 살해. 

셋째는 간신히 도망쳐서 집으로 몰래 가는길에 물에 빠져죽었다


더구나 수터가 재건한 땅은 다시 강탈당하고 불바다가 되었으며 수터는 또 혼자 살아남았다. 

악에바쳐 다시 수터는 소송에 들어갈 준비를하며 25년간 워싱턴의회와 법률 사무실을 오가며 노력했지만 1880년 6월 17일 수터는 가혹한 인생을 마감한다. 


영화와 소설에서는 모험과 낭만으로 그려졌던 골드러시지만 이면에는 철저하게 짓밟힌 한 인간의 삶도 있었다고 기억해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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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에 차우셰스쿠 (Nicolae Ceauşescu) 

 

 

루마니아의 독재자였으며 김일성과는 의형제를 맺기도했다. 

 

뛰어난 1인정치의 독재자가 있으면 초고속 발전을 할수있으나,

멍청한 독재자가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보여주신분이다.

 

 

 

 

 


 

 


 

북한을 따라 자신을 개인숭배하는 대상으로 발전시키려 하였고, 김일성의 정책을 열심히 모방하려 하였으나 

유럽인 루마니아에 적용하려한게 중대한 실수였다.

북한이야 유교사상에 길들여졌고 독립투사로 둔갑하고 반일정서를 이용해 아바이수령작전이 먹힌거지,

제한적이었지만 민주주의 맛을 본적있고 공동체에 대한 헌신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인주의 전통을 가진 유럽인들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지


이 인간의 정책중 가장 멍청한 정책은 바로 인구정책이었다.


“에... 국가가 수출 안하고 내수진작효과 낼수있는 인구수가 얼마냐?”

“한...1억 잡아야겠죠?”

“그치? 내가 생각해봤는데 루마니아가 강해질려면 역시 머리수가 많아야할거같아.”


맨날 드라큘라의 나라로 불리는게 지겨웠는지 루마니아를 발전시키겠다며 야심차게 새로운 인구 정책을 내놓는다.


“앞으로 루마니아에서 이혼,낙태,산아조절 모두 금한다. 태아는 사회전체의 재산이다! 이혼,낙태,산아조절을 할수있는 여성은 아이가 넷이상이거나 공산당 당원이어야한다!“ (구글에서는 5명이라고 나오더라)

 

 


 

당연히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게 말이 되!! 그런게 어딨어!!”


반발했지만 어쩌겠나 최고권력자가 하라는데 해야지


근데 문제는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기 전까지 루마니아는 상당히 프리했었다. 

1966년까지 루마니아에서는 평균 5건의 임신중 1건만 출산, 나머지는 낙태하는 나라였는데 난데없이 국가에서 금지시킨거다.

낙태시술하는놈들 피임약 먹는놈들 피임기구 수입하는놈들 모두 죽인다!

강력한 압박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은밀하게 불법 낙태시술과 콘돔,피임약이 밀수되었다

하지만 수요는 많고 공급은 어려우니 당연히 값은 오르게되고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강력한 인구정책을 시행하면서 월경경찰까지 만드는데 이들은 직장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임신을 독려하고 임신한 여성을 표창한다.

임신하지않은 여성에게는 강요와 세금까지 물리며 압박하며 

네명이 한조가 되어 벌거벗고 산부인과로 들어가 한번에 진찰받는 가축같은 취급을 당한다.




이렇게 밀어붙이니 임산부는 계속 늘어만 갔다.


하지만 헝가리로 낙태시술을 받거나 망명하려는 산모들은 다뉴브강을 건너기위해 몰려들고

다뉴브강 건너려다 걸린 산모들은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이렇게 강력한 정책의 결과 1년만에 신생아 출생률이 두배로 늘어났는데....


"지도자 동지! 신생아 출생률이 두배로 늘어났습니다!"

"요시! 역시 난 천재야!!!"

"근데 유아사망률도 145%나 증가했습니다"

"........."

당장 보육시설과 육아 시설이 부족하고 소아과 의사도 부족한데 애만 낳아대니 유아사망률은 증가할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차우셰스쿠는 또다시 기똥차게 멍청한 생각을 하는데


“유아 사망률을 줄여야할거같습니다.”

“유아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생후 한달이 지나지않은 아기에게 출생신고서를 끊어주지마”

“완전 그럴싸한데?...”


당장 출생신고서를 끊어주지 않자 부모들은 장애아들을 시설로 버리게 된다. 

보호 시설로 보내진 아기들은 방치되어 죽거나 쇠약해졌는데 체력 강화를 목적으로 수혈하다 또 에이즈에 왕창 감염시킨다.


“뭐 어쨌든 인구수는 늘어났잖아. 그게 중요한거지”


차우셰스쿠는 스스로 정책결과에 만족하고 딸쳤지만 태어난 아이들과 부모들은 만족할수없었다. 

차우셰스쿠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은 다른세대의 아이들과 달리 학업 성취도, 노동시장에서의 선호도 등 월등히 뒤떨어졌고 , 반대로 범죄율은 다른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높았다.


부모가 원하지도 않는데 태어나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되면 사회의 패배자로서 살아가게되다가

1989년 동구권이 붕괴가 시작되며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은 거리로 나온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1989년 12월 25일 차우셰스쿠와 마누라는 대량학살을 비롯한 여러죄목으로 기소되었고 총살을 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차우셰스쿠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이 차우셰스쿠 정권 타도 시위대의 선두로 서서 몰아냈던것.


인구정책에 초점을 둬서 글을썼지만 차우셰스쿠의 삽질은 이밖에도 호화로운 인민궁전을 짓고 사치를 일삼으며 무리한 공업화로 빚을 지는등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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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외과의사=이발사


 


만화에 의사가 나온다면..

 

닥터K나 블랙잭, 의룡 같은 만화나 드라마보면 천재외과의가 주인공인 작품들이 많다.

안과의사나 피부과의사가 응급상황에 뛰어와 멋지게 치료하는 작품은 본적이 없다.

 

그정도로 현대사회에서 외과의의 대접은 좋고 그만큼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근데 몇백년전에는 외과의사를 의사대접 안해주고 대학에서 외과학과 자체가 퇴출당하기도 했었으며,

이발사와 경쟁했다고 한다.


 

<영화에는 나온적은 있네, 영화 롤러코스터 中>



때는 13세기 중엽, 유럽 최고의 의과대학인 파리대학에서 외과 과정수업을 완전히 폐지했다. 

이유인즉슨, 의사들이 하기엔 너무 천박한 일이라는 것이다. 

꼬매고 고름짜는일은 이발사로도 충분하다는 논리! 

대신 의사들은 고귀한 의료행위로써, 피 뽑기인 사혈과 장 청소인 관장을 통해 환자들을 치료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의 의료 상식은 몸속에 있는 나쁜 피를 뽑거나 관장을 통해 나쁜 기운을 없애면 병이 낫는다! 였다

 


덕분에 의료현장에서 활약하는 의사의 수는 외과의보다 내과의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파리대학에서 외과과목을 정규과정에서 제외시키자,

유럽의 다른 의과대학에서도 덩달아 외과 과목을 폐지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밥그릇 뺏기고 차이게된 유럽 각지의 외과의들은 들고 일어나는데...


“x같아서 못해먹겠네... 우리가 대학 만들자 우리가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면 되잖아?”

“내과는 알아서 하라고 하고, 외과의끼리는 따로 뭉치자!”


이리하여 파리, 에든버러, 앤트워프, 런던 등에서 개업했던 외과의들이

 

저마다 대학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학생들을 받았다. 

 

 

 


 

하지만 시대의 대세는 내과였다.

점점 외과의가 설곳이 줄어드는 상황. 그래도 단결한 외과의들의 화력은 대단했다.


“이발사들이랑 동급으로 취급받으니까 짜증난다”

“그새끼들은 가운이 짧으니까 우린 긴가운을 입자!”

“그래! 가운은 길어야 권위가 사는거야”


물론 가운만 길게한다고 없던 권위가 갑자기 생기는건 아니지만 그렇게 외과의들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가운을 입고 진료에 나선다.


이렇게 외과의들이 똘똘뭉치자 내과의들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외과놈들이 모여서 학교를 만들었대”

“이발사나 다름없는새끼들이 이제 의사흉내를 내려고하네..”

 


이번엔 내과의들이 뭉쳐 대학에 외과 속성반을 만들어버린다. 

목적은 이발사들을 가르쳐 이발외과의사 자격증을 줘서 외과의의 권위를 박살내 버리는 이었다.

 

 

 

 


“상처난 환자는 피를 빨아줍니다”

“곪은 환자는 고름을 빨아줍니다”

“좋습니다. 이제 당신은 외과의사가 됐습니다”

 

 


 

이렇게 무분별한 자격증 뿌리기로, 무서웠지만 속성으로 외과의가 된 이발외과의들은 사회에 퍼져나가게 된다. 



 

<아드리안 브라우베르의 작품 '수술' 치료하는 오른쪽옆에 이발사가 면도를 하고있다>


 

 


 

그리고 그들만의 조직을 구축하며 정규과정을 거친 외과의들의 상징인 청백적 간판을 내걸기까지한다. 

(그래도 나선표시로 변형되어 차이는 있었다. 오늘날 이발소앞에 걸려있는 청백적 간판은 이렇게 만들어진것.)


그러자 환자들은 어디가 정규과정을 거친 의사의 병원인지, 어디가 속성반을 거친 이발외과의 병원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순 돌팔이 새끼들이야”

“외과에 가면 맨날 빨간약만 발라줘”


내과의들이 원했던 여론이 형성됐다. 

환자들은 외과의사를 믿지못하게되고 진짜 의사는 내과의라는 결과물을 얻는다.


그러나 이렇게 외과의가 받던 푸대접을 일거에 뒤엎어 버리는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루이14세다.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었던 태양왕 루이14세. 심각한 치질에 걸렸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자체가 어려운 지경이었는데 어의들은 당연히 내과의들이었다.

가필드 대통령처럼 어의들은 치료한답시고 연고바르고 고약을 쓰다가 쓸데없이 관장만 하면 낫는다! 관장! 관장! 이런 분위기였다. 

(루이 14세는 근 2천회 이상 관장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장을 해도 치질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이14세는 항문치료를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똥꼬안을 살펴보게한다.


본격적인 똥꼬검사에 들어가자 항문에서 자그마한 혹을 발견하게된다. 

내과의들은 끽해야 치핵 정도로 알았는데 혹의 등장으로 묘하게 꼬이게되고...

속수무책인 내과의들 앞에 치질의 신 샤를 프랑수아 펠릭스 라는 외과의가 등장한다.

 

 


 

 

<샤를 프랑수아 펠릭스>

 

 


 

펠릭스는 그동안 수많은 임상실험을 하며 치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근데 몇 명 죽였다고 카더라) 

본인이 루이14세의 치질을 고쳐준다고 장담하였다.

근데 몸에 칼을 대서 수술을 해야하고 펠릭스에 대한 루머 (수술하다 사람을 여럿잡았다 카더라, 마루타가 죽으면 몰래 공동묘지에 묻는다 카더라) 를 들은 루이14세는 좀 갈등한다.


하지만 이런 위험부담을 떠안을 정도로 치질의 고통은 극심했다.


“젠장 그래! 수술하자!, 실패하면 죽여버리면 되니까”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루이 14세는 감동했고 펠릭스는 인생역전된다.

게다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과 비슷한 생활을 했던 귀족들도 치질에 많이 걸렸는데 

이들 모두 수술해 주며 펠릭스뿐만 아니라 외과의에 대한 인식자체가 바뀐다.


절대왕정국가에서 왕의 신임=출세

이제 시대의 대세는 외과의가 되었다.

외과의사들은 기회를 놓치지않았고 다양한 수술법을 개발하며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된다.

물론 루이14의 치질이 아니었더라도 아마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외과의의 중요성이 언젠간 부각되었을거다. 

하지만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교차로라고 그로인해 한발 빨리 외과의가 빛을 보게된것은 분명하다.

 

 

Posted by 쉬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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