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극한의 인성으로 지옥문 앞까지 갔던 메이저리그 선수를 소개해볼게

흔히들 좌완 강속구투수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오라 라는 말이 있지?

이번에 소개할 선수가 좌완 강속구 투수거든

 

마무리투수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존 로커

 

좌완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알렸던 'John Rocker'

 

 존 로커는 박찬호 경기를 조금이라도 봤던 아재들이라면 한 번쯤 떠올릴만한 선수야

당시 박찬호가 다저스 에서 선발로 날아다니던 2000년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었거든

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타선도 강력했지만 선발투수진으로 따지면 정말 가히 역대급 팀이라고 해

 

왼쪽부터 톰 글래빈, 존 스몰츠, 그렉 매덕스

 

당시 애틀랜타의 선발진 3명은 지금 현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어.

존 스몰츠,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이라는 역대 최강의 선발진에 중간계투진도 나름 탄탄했기에 강팀이었지 

(하지만 이 멤버로 월시 우승 몇 번 했냐고 묻지 마시길.. 1995년 이후는 없다...) 

 

기존 마무리투수 였던 케리 라이텐버그

 

주전 마무리 투수였던 케리 라이텐버그 가 부상으로 시즌 아웃당하자

팀 내 유망주였던 존 로커는 99년부터 마무리 자리를 꿰차고

강력한 직구를 바탕으로 최고의 좌완 마무리 투수로 메이저리그를 시작해 

 

세이브를 기록할 때마다 한 마리 야수처럼 소리를 질러내던 존 로커는,

이 당시 38세이브를 기록하며 일약 스타로 뛰어올라

 

 하지만 너무 쉽게 성공에 취해버린 걸까

존 로커는 갑자기 해서는 안될 말을 하면서 물의를 일으켜

 

1999년 마무리로 잘 나가던 당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와 의 인터뷰 중

“뉴욕은 게이와 소수 인종들로 넘쳐나고 있다. 특히 메츠의 홈구장 셰이스타디움으로 가는 지하철 7번 라인은 ‘더러운’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들로 가득 차 있다”

미국에서 결코 절대 입 밖으로 해서는 안될 유색인종과 동성애자 들을 비난하는 말을 한 거야.

 

많은 뉴욕의 시민들은 존 로커의 언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당시 대통령 후보까지 언론에서 싸잡아 비난했으니 말 다했겠지?

물론 이 말고도 같은 팀의 흑인 동료를 동물에 비유하기도 하는 등 혓바닥으로로 메이저리그를 농락

 

 

흔히들 야구를 멘털 게임이라고 하는데 천하의 존 로커도 견디기는 힘들었나 봐

그 가 가는 경기장마다 관중들은 비난을 했고

뉴욕 메츠의 홈구장이 셰이 스타디움은 애틀랜타와 경기가 있는 날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향해 심한 욕설과 야유를 보냈어

 

결국 흔들리기 시작한 존 로커는 트레이드를 통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떠나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갑자기 잘 안되던 야구가 팀을 옮기다고 해서

갑자기 잘될 리가 만무했기에 성적은 본인의 구위처럼 가라앉기 시작해

 

 

2001년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화를 내고 있는 존 로커와 왼쪽은 찰리 매뉴얼 감독

 

결국 이 팀 저 팀 떠돌아다니면서 재기를 꿈꾸던 로커는 화려한 은퇴가 아닌 씁쓸한 패장의 길로 메이저리그를 나올 수밖에 없었어

물론 본인은 메이저리그 생활을 좀 더 꿈꾸었기에 독립리그에서 현역 생활을 유지하며 복귀를 갈망했지만

이미 가라앉은 구위와 구속 그리고 전성기에 비해 느려진 투수에게 기회를 주는 미련한 구단은 없었기에 포기해야만 했지 

 

더욱 처절했던 건 31살이 된 존 로커는 20대 시절,

인이 비난했던 뉴욕 메츠에서 라도 뛰기 위해 뉴욕의 시민들에게 사과했어

본인이 비난했던 이유는 당시 애틀랜타와 라이벌 팀이었던 메츠를 비난하여,

좀 더 라이벌 관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뿐 이라며 이해해 달라고 말이야.

 

물론 반응은 무관심

존 로커의 메이저리그 성적

 

하지만 이렇게 끝났으면 그나마 잘 나가던 추억 속의 악동 정도로 끝났을 테지만

존 로커는 금지약물 복용 전과까지 드러나면서 돌아올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고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약물을 권장한다라는 발언 등. 밑도 끝도 없는 발언을 내뱉으며

정점을 찍어보려고 작정을 했었는지 라디오 방송에서 존 로커는

'약 빨아도 구속 안 빨라짐ㅋ'이라고 이야기하며 정말 갑 중의 갑 을 찍어

 

이렇게 점차 잊히는가 했던 존 로커는

한 TV 프로그램 '서바이벌'을 통해 근황을 알리게 되었어

 

프로선수 출신이니 역시 몸은 지린다

 

최근의 국내 기사로 밝혀진 근황으로는 칼럼니스트로 일 하게 되었다고 해.

물론 얼마나 양질의 글을 기대하기보다는 본인의 현란했던 혀처럼 얼마나 자극적인 글을 써낼지에 더 관심이 가지.

 

끝으로

옛말에 말은 한번 뱉으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고 했어.

그만큼 말을 하기 전에 얼마나 신중하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우리 선조들이 알려주는 좋은 교훈을 받들어 혀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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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최민호를 유도 최강자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최민호는 사실 이원희, 김재범같은 그랜드슬래머에 비하면 커리어는 많이 부족하다. 


여러 유도 대회에서 금메달보다는 동메달을 훨씬 더 많이 땄던 선수야.

 

 


부산아시안게임, 아테네올림픽, 05 리우세계선수권. 07파리오픈, 07아시아 유도선수권, 07코리아오픈. 07가노컵, 그리고 광저우 아시안게임까지


동메달땄음.  본인도 동메달따는게 지겹다고 할 정도로 동메달 징크스에 시달리던 선수지.  








그러나 인지도와 인기로는 아마 김재범, 왕기춘을 넘고 2천년대 초반 이원희와 비견될만한 선수인거 인정.


08 베이징 올림픽때의 강려크한 한판승의 이미지 때문이겠지. 당시 전경기를 한판승.

 

특히 결승전에서 보여준 다리잡아메치기는

 

 


가히 유도역사상 최고의 임팩트를 줬던 장면이었다. 


예전글에도 언급햇지만, 김재범은 81kg 최고의 선수지만 한판승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지않는 유도" 를 하는 이미지라 일반 대중들에게 많이 언급되진 않지.


참고로 유도에서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이 4개를 다 우승하면 그랜드슬램이라는 표현을 쓴다.


최민호는 동메달로 그랜드슬램을 이뤘다고 "동메달 그랜드슬래머"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최민호와 김재범










그럼 이제부터 올림픽 중심으로 최민호 커리어를 언급해 볼께





최민호는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 60kg 을 우승하며 동체급 최강에 등극하고 바로 국가대표로 04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한다.


하지만 경기 전에 체중감량에 실패하며 근육경련을 안고 올림픽 토너먼트에 참가하지. 


첫경기에서 루트비히 파이셔를 빗당겨치기 한판으로 꺾었으나, 다음경기에서 몽골선수를 만나 갑작스런 근육경련에 결국 한판패를 당한다.


하지만 그후 패자부활전에서 나머지 경기를 한판으로 꺾고 기여이 동메달을 따먹어버림.


 


 



참고로 유도는 더블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제도를 운영하는데, 쉽게말하면 한번 지더라도 패자부활전을 통해 동메달을 딸 수 있다. (주짓수도 마찬가지)


아테네 올림픽은 이원희의 독무대였다. 첫경기를 제외한 모든경기를 한판으로 이기고 금메달을 따셨제






이후에 절치부심하고 쾌조의 컨디션으로 베이징 올림픽에 나온 최민호는, 자신의 장기인 업어치기와 업어치기와 연계하여 들어가는


다리잡기 기술로 파죽지세로 한판행진을 벌이며 결승에서 루트비히 파이셔를 다시 만난다. !!!!




파이셔는 유럽선수권대회를 두번이나 우승한 당시 강려크한 금메달 후보였고  04아테네에서 최민호에게 첫경기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기에 


 절치부심하며 최민호에게 복수를 다짐했음.


결과는??




 

 


최민호에게 공중제비당함.


 





 


 




내가 생각하기로 한국 유도 역사상 최고의 임팩트있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얼마나 임팩트있냐면, 7년이 지난 지금도 각종 커뮤니티에서


딱지치기로 언급될 정도.

 

같은 체급에서 도저히 나오기 힘든 괴력의 한판승으로 대서특필 되었어.

 

넘어저서 중심잡고 버티는 상대를 한팔로 들어서 


공중에서 반대로 돌려서 내다 꼳는게 상식적인 힘으로는 불가능함.





 


 


중량급 선수와 비슷하게 중량치는 괴력의 소유자가 최민호임. 


자기 몸무게 3배하고도 반을 더드는데 뭐 60kg 사람따위 공중제비돌려서 딱지를 쳐버리는거 일도 아니것지.

 




최민호는 이원희도 하지 못한 올림픽 토너먼트 전경기 한판승의 기록을 세우며


국민적인 인기를 얻기 된다.

 

(한판승의 마법사 이원희는 04 아테네때 첫경기에서 한판승 못함. 이후에 죄다 한판)


특히 결승전에서 루트비히 파이셔를 다리잡아메치기 한판으로 딱지쳐버린 장면은

 

7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마 한국 유도 최고의 명장면이 아닐까 싶어.








이후에  최민호는 목표를 잃은 상실감, 허탈감, 다시 유도를 하기 두렵다는 생각에 반년동안 운동을 하지 못했다고 해.


하지만 그 이후 맘을 잡고 체급을 66kg으로 올려서 세계랭킹 100위권 바깥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데 


 국내 체전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승했지만 세계선수권1회전 탈락도 하고 생각보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진 못한다.

 

그러다 2010년 아시안게임 때 다시 60kg로 돌아왔으나 본인이 과거에 베이징올림픽에서 이겼던 소비로프에게

 

패배하며 동메달을 따고 다시 66kg으로 올리고 2012 런던올림픽을 준비하게 됨.






2012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는 선발전, 선발포인트, 세계랭킹을 합산하여 강화위원회에서 체급별 1명을 뽑는다.


국제대회성적이 저조한 최민호는 2012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따고 랭킹및 포인트를 올리는데 주력했지만 


세계선수권 동메달, 유도월드컵 금메달을 따낸  동체급 조준호에게 완전히 밀리는 상황이었어.


따라서 국대 선발전이 매우 중요했고,  이 국대선발전에서 최민호는


기적처럼 결승에서 조준호를 만나게 되는데......






 


 



업어치기 하는척 하면서 다리잡아 메치기 


조준호를 공중제비돌리면서 국대 선발전에서 우승했고,  유도팬들은 난리가 났음.


전성기도 지나고 국제대회성적도 안좋고, 자기체급도 아닌 선수가 국대선발전에서... 그것도 조준호를 이기다니...


최민호 죽지 않았구나... 다들 그랬지...




참고로 저 기술은 ufc 선수인 론다로우지가 잘 쓰는 기술이기도 한데 론다는 08 올림픽에서 저 기술을 쓰다가 


네덜란드의 에디스보쉬에게 되치기를 당하고 토너먼트 탈락후 동메달을 따게 된다.


론다의 유도 커리어는 올림픽동메달, 세계선수권은메달, 펜아메리카선수권 금메달, 펜아메리칸게임 금메달






저 장면은 스포츠뉴스로 공중파를 타게 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최민호가 또 올림픽에 나가는 줄 알게 되었으나....


 협회의 선택은 최민호가 아니라 조준호였어. 


왜냐면 세계랭킹에서 훨씬 앞서는 조준호가 토너먼트에서 유리한 시드를 받아서

 

쉽게 메달권으로 갈 수 있다는게 이유였지. 


대다수의 국민들은 베이징올림픽때 최민호의 압도적인 모습만을 기억하다보니 

 

최민호가 항상 대회마다 우승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조준호가 뽑히자 유도협회를 엄청나게 비난하게 된다.

 

유도협회는 맞대결해서 이기는 선수보다, 오로지 메달따기 수월한


선수를 뽑았던 거고, 관점의 차이인거 같다. 그런데 그럴꺼면 왜 대표선발전을 한건지는 의문이다







이 결과를 들은 최민호는 상심한 나머지 잠적하고 술마시고 울고 하다가, 대인배처럼 다시 나타나서


조준호를 돕게 된다. 조준호도 최민호를 위해 금메달 따겠다고 말함.


조준호는 런던올림픽에서 희대의 판정번복을 당하면서 어처구니 없이 토너먼트를 탈락하고 동메달을 따게 된다.


그리고 최민호는 파란만장한 유도선수를 접고 은퇴를 함과 동시에 송대남과 국대코치가 되었다.



 



최민호 최근 모습인데 3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한 동안이다.




최민호는 163cm의 작은 키를 이용한 업어치기가 장기인 선수인데  업어치기를 변칙적으로 구사한다


일반적인 업어치기는 어깨로 넘거서 떨구는 반면 최민호는 도복을 x자로 엇갈리게 잡고 오른쪽으로 들어서 왼쪽으로 


넘기거나 굴리는 최민호만의 업어치기를 구사한다고 함. 업어치기 이후에 연타로 들어가는 다양한 컴비네이션도 뛰어남.





최민호는 다른 유명 유도선수와는 다르게,

 

사생활적으로 문제가 된적도 없고 음주운전 기록도 없고 연습벌레로 소문났음.


그래서 좋아함.

 

코치가 된 이후에도 사람이 모질지 못해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선수에게 지적질을 못한다고 함


대신 따로 불러서 가르친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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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어마무시한 말을 학창시절 윤리시간에 한번쯤 다 외워봤을거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와중에서 신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관의 무게중심을 옮긴 위대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사실 이 위대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늦잠 자길 좋아하는 잠 마왕이었다.


 

<데카르트>

 

 


 

17세기 초반, 프랑스의 소도시 부유한 귀족부모 밑에서 은수저는 물고 태어나 

어릴적부터 명문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똘똘했던 데카르트를 부모는 기숙학원에 보내서 천재로 만들고 싶어 했다.


여덟살이 된 데카르트는 라플레쉬에 있는 예수회 학교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일생의 습관이 되는 늦잠 명상을 체득하게 되는데...

 

 


 

“자~ 착한 어린이들은 일찍 일어나야해요. 일찍일어나서 이부자리 정리하고 하루를 어서 시작합시다~”

 

“선생님!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명상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간입니다. 가장 명료한 정신 상태인 이 시간에 침대에 누워 세계를 통찰하는 것이 훨씬더 좋은 하루를 시작할수있는거 아닌가요?”

 

“뭐라는거야 이놈은!...”


 

 

 

여덟살에 예수회 학교에 들어간 데카르트는 이때부터 늦잠 자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데카르트는 오전 열한시까지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철학을 다듬어 갔던 것이다. 

건강에도 좋고, 철학에도 좋은 방법이었다. 이런 늦잠의 결과물이 바로 ‘방법서설’이었다.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구원이라는데 그거 다 구라야. 학문의 진짜 목적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되는 것’이야. 

그리고 모든 학문하는 이들의 기본 연구 방법은 수학적이어야해. 일단 의심부터 해야해! 이게바로 ‘방법적 회의’라는건데 생각해봐. 

신학이라는게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게 신앙심이야. 일단 믿고 시작하는데 이게 학문이 되겠어? 학문의 기본은 의심이야! 일단 의심해야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그의 주장은 지금 우리들에겐 "옳거니!" 하겠지만 그당시 사회에겐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이제까지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되던 ‘신의 존재’를 의심한 것이다. 30년 전쟁으로 기독교의 권위가 흔들리던 그때 난데없이 등장한 데카르트의 일격. 

교회는 흔들렸고, 사람들은 데카르트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데카르트의 이런 급진적인 주장이 인기를 끌자, 기독교측은 반발했다.

 

 


 

“데카르트는 사기꾼이다!”

 

“학문에 정진 하는건 좋은데, 왜 애꿎은 신을 들먹이는거야?”

 

“성경 자체도 부정했다던데?!?!?!!”


 

 

분위기가 슬슬 묘해지고 예전만 못해도 이때까지의 교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게 아닌데... 이러다 붙잡혀가서 화형당하는거 아냐? 괜히 책 써서 죽을거 어쩌지?....”


 

철학적으로는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 위대한 선지자나 다름없었지만, 일상에선 데카르트는 소심한 학자였다.


 

 

“예전 갈릴레이꼴날거같은데... 그냥 조용히 살까?..."

 


 

이런 소심한 성격은 책이 출판되기 전에 네덜란드로 이민을 갈 것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이때 당시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오른 나름 잘나가는 나라였다. 

근데 그는 단지 강대국이어서 네덜란드에 간게 아니라 바로 네덜란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국민성 자체가 오픈 마인드자신과 다른 주장을해도 용인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어.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21년간 숨만 쉬며 지내게 됐는데..

 

아무리 오픈마인드의 네덜란드라도 데카르트의 급진적인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데카르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한다!”

“데카르트는 매우 위험한 사상가다!”


점점 데카르트를 옭죄어 오는 유무형의 압력들, 이제 네덜란드도 위험한 땅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쯤 툭 하고 튀어 나온것이 스웨덴의 여왕인 크리스티나였다.


“내가 요즘 교양을 좀 쌓아야 할거같은데 철학 좋잖아? 있어보이는 척 하기도 좋고?”


크리스티나 여왕은 철학 과외선생을 찾고 있었고 데카르트에게 권유하자

데카르트는 일단 살고봐야했고 조여드는 압력 속에서 스웨덴행을 택한다.

그런데 이 스웨덴행이 인생의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이야 누가알았겠나...

 


“데카르트 선생? 내가 아침형 인간이거든? 내 과외는 오전 다섯시부터 했으면 좋겠어. 

이른아침에 머리가 제일 잘돌아가잖아. 맑은 공기 마시며 철학을 논하는게 괜찮을 것 같애”


“저기... 오전 다섯시는 아침이 아니라...새벽 아닌가요?...

해도 뜨기 전인데, 그때 일어나라고요?... 전 11시까지 늦잠 자는 스타일인데...”


 

 

하지만 갑은 여왕이다. 데카르트는 쫓겨나서 뒈지기 싫으면 해야지 어쩌겠나.

5시에 비몽사몰 강의하던 데카르트... 

 

그의 몸은 즉각 이상 신호를 보내게되고, 원래 늦잠으로 체력의 열세를 극복하던 데카르트는 늦잠을 못잔것도 문제였는데, 추운 북국의 새벽공기의 어시스트로 인해 얼마뒤 폐렴에 걸리고 그대로 약한번 못써보고 하늘나라로 영영 떠나게된다.

 만약 새벽잠 없는 여왕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늦잠을 보장해주었다면, 데카르트는 더 오래살면서 인류에게 혁신적인 철학의 방향을 제시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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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리 퀴리


마리퀴리(Marie Curie)하면 초등학교시절 퀴리 부인으로 위인전 한번쯤은 읽어봤을거고 ,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이라 추앙받는 퀴리부인이라 할정도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고 

프랑스 저명인사들만 묻힌다는 판테온에 안장되었으며

유로화 쓰기전 프랑스 제일 고액권 5백 프랑화에 초상이 인쇄되었던,

여성중에 가장 인류에 공헌한 사람이라고 할수있겠다.

 

이젠 퀴리부인이라 부르지 않고, 마리 퀴리로만 나오던데 뜬금없지만, 그만큼 강해진 여성파워에 실감한다. 

그 위인전 뒷부분에는 안나오던 불륜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상황까지 가던 마리 퀴리를 알아보자.


 

 

 

 

 

<피에르 퀴리와 마리퀴리>

 

 

 


마리와 피에르, 폴란드계 유태인이며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성 물리학 박사였던 마리는 여덟살 많은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 3년후 어느날 라듐을 발견하는데...

라듐의 발견으로 피에르는 노벨물리학상의 후보로 추천! 근데 이 첫 번째 노벨상 수상에서 마리는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런게 어딨어! 울 마누라가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데!!! 울마누라 이름 안넣어주면 나 노벨상 안받을거야!!”


피에르는 마리의 공동수상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03년 노벨물리학상은 피에르 퀴리, 마리퀴리, 앙리 베크렐 세사람이 공동 수상하게된다.

부부는 행복했고 두딸은 잘자라주었으며, 연구는 인정받았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행복은 오래 가지 않고,

 

불륜의 주인공 피에르의 제자 폴 랑주뱅이 나온다.

 

폴은 유능한 제자였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연구에 있어서는 특출난 성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이론을 깔끔하게 정리잘하는 밑에 두고 호구로 부려먹기 좋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폴과 마리는 남편제자와 사모님 관계일 뿐이었는데...


1906년 5월 7일, 복잡한 길을 지나던 피에르는 짐마차 바퀴에 깔려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피에르의 나이 마흔일곱, 마리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11년간 부부이자, 동료이며 친구였던 피에르와 마리였기에 피에르의 갑작스런 죽음에 마리는 오열하며 힘든 나날을 보낸다. 마음의 구멍이 너무 컸던 마리를 위로해주던 폴에게 마리는 상실감을 달래려 하다 그만 눈이 맞게된다.

 


 

이둘은 사랑하게 되지만, 문제는 이둘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용납될수없는 사랑이란 것이다.

 

 

 

스승의 여자라서? 남편의 제자라서?

 

 

 

그게 아니라 문제는 폴이 유부남이었다.

 

 

연구밖에 모르고 피에르와 진실로 사랑했던 마리도 늦바람이 불어 적극적으로 불륜을 즐기며 아파트까지 구해 밀회를 한다. 그러다 폴의 마누라한테 걸렸다.

 

 


 


<제 1회 솔베이회의, 앉아서 턱괴고있는 여자가 마리퀴리, 사진 맨 오른쪽이 폴 랑주뱅이다. 그옆은 아인슈타인>

 

 

 


 

 이런 상황에서 1911년 마리는 노벨화학상 수상 결정이 났는데... 

폴의 마누라가 마리가 폴에게 쓴편지와 함께, 불륜의 전말을 일간지 뢰브르에 보내어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당연히 신문에 대서특필되면 프랑스는 뒤집어졌다.

 

 


 

“유태인년이 착실한 프랑스유부남을 꼬셨다!”

 

“가정파괴범 퀴리!”

 

 


 

이쯤되자 앞이 무서워진 폴은 얼른 가정으로 돌아간다.

졸지에 언론의 까발림당하고 남자에겐 버림받은 마리...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도 마리에 대한 노벨상을 다시생각하게 된다.

 

 


 

“아...상을 주자니 그렇고 안주자니 또 그렇고...”

 

“근데 준다했다 뺏을수도 없잖아 불륜이랑 과학이랑 무슨상관이야??”

 

 


 

어쨌든 마리는 1903년에 이어 1911년에 다시한번 노벨상을 받는다.

하지만 국가의 명예이건만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녀가 노벨상의 권위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했으니...

 


 

본문과는 상관없으나 퀴리집안에서 노벨상은 또있다. 

큰딸 이렌느와 사위가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아서 2대에 걸쳐 부부가 노벨상을 받았고

그리고 자기 어머니 퀴리부인이라는 전기를 쓴 둘째딸 이브퀴리는 2차세계대전당시 전쟁특파원으로 활약하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 사무총장 특별 보좌관을 했으며 그의 남편은 유니세프 대표로 노벨평화상까지 타니 노벨상 4개나 받은 어마어마한집안이다.

 

 

 

 

<이브 퀴리>

 


 

이브 퀴리는 이런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우리집안의 수치입니다. "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남편 모두 노벨상을 받았는데 저만 못받았거든요.”

 

 

 

북대서양 조약기구 사무총장 보좌관한 사람이 정말 저런말했으면 우리들은 다 부끄러워 죽으라는 건가보다

 

 

Posted by 쉬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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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소피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부활’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대문호! 

책은 안읽어봤어도 최소한 제목 정도를 알고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며, 마누라 소피아는 3대 악처로도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마누라가 얼마나 싫었으면 여든둘 노구를 이끌고 가출해서 객사했을까 할텐데,

소피아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뭐야? 객사할만한 이유라고? 흥분말고 일단 좀 들어보자



 

<톨스토이와 소피아, 톨스토이가 죽기 두달전 사진>


 


 

 작품만 보면 톨스토이는 천재라고 할수있을텐데, 젊은 시절 톨스토이는 개였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하녀들과 놀고 다니며 도박과 여자에 환장했었다.

(톨스토이가 여자에 집착했던 것은 바로 두 살때 어머니를 잃는 바람에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보통남자들이 부러워할만한 20대를 흘려보낸 톨스토이는 30대가 되자 슬슬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는데...

 


 

“야 남자는 결혼을 해야 사람이 되는거야. 난 이쁜 마누라 만나서 너무행복하다. 너도 얼른 장가가라”


궁정 의사였던 친구가 톨스토이를 결혼하라고 바람넣었다.

그러던중..

 

톨스토이가 반한 여자가 있었으니!


톨스토이를 한눈에 반하게 만든 주인공은 그 친구의 딸이었다.

친구는 처음에 나이차때문에 반대했지만 톨스토이의 끈질긴 구혼으로 7일만에 

18살 민증에 잉크도 안마른... 아니 민증도 안나온 딸을 서른넷에게 넘겨주게 되는데, 이때가 1862년 9월 23일이었다.


서른넷의 톨스토이와 아직 아징 창창한 18세의 소피아...

 

심지어 톨스토이는 당시 아들도 하나 있었다. 

물론 법적 혼인으로 얻은 아들이 아니고 자기 메이드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였지만, 톨스토이의 아들이었다.


16살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톨스토이는 부부사이에 비밀이 없어야 한다며 서로에게 일기장을 보여주자고 제안하고, 신부에게 자신의 15년치 일기장을 건넨다.


물론 취지는 훌륭했다. 일기장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바람직한 부부상을 꿈꾸자했었는데 오래가진 못했다. 

 

왜냐?

 

술마시고 도박하고 여자만난 걸 적을수는 없으니 아내가 보는 일기와 자신만의 비밀일기 두 개의 일기를 쓰게된다.

뭐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어린 신부는 그렇게 교환일기를 하게되는데 일기장에는 젊은 시절 여자와 도박에 빠져 살던 톨스토이의 행적이 쭈욱 적혀있었다.


서른넷의 톨스토이에게 지나간 추억 정도로 치부할수있겠지만 열여덟 때 묻지않은 소녀에게는 그 일기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중 일기라서 그나마 공개용이었을텐데)

결국 톨스토이의 일기장은 어린신부에게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켰다.


거기다 톨스토이는 쉴새없이 잠자리를 가져 무려 열세명의 아이들을 낳게되었다. 

 

뭐 부부 금술이 좋아 애를 많이 낳았다는데 누가 뭐라겠나. 게다가 둘다 ㅅㅌㅊ집안이어서 돈걱정도 안해도 되는데...

근데 문제는 톨스토이가 모성애에 대한 집착이 강해 유모를 들이지않겠다는 완강한 고집이었다. 

당시 귀족들이나 나름 먹고살만한 집에서는 유모를 부르는게 상식이었는데 배꺼질날 없고 젖마를날없는 소피아는 슬슬 화가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원래 허약하게 태어난건지는 모르나 열세명 자식중에 여섯은 어려서 죽게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톨스토이는 끊임없이 소피아에게 잠자리를 요구했고 유모는 반대했다.

여기까지였으면 소피아도 그냥저냥 버티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돈은 많겠다. 시간도 많겠다. 애들 키우는낙으로라도 산다면야... 그러나


“헤이~ 여보달링자기마누라 이거 내가 이번에 쓴작품이야”

“전쟁과 평화... 엄청 두껍네... 근데 설마....”

“응... 자기가 교정좀 봐줘^^”

“........”


천재는 악필이라고 했던가? 대문호 톨스토이의 원고는 사람이 읽을수없을 정도의 악필이었다. 

이 악필을 사람이 볼수있게 교정하는일은 언제나 소피아의 일이었다. 

 

육아와 교정 작업까지 떠맡은 소피아... 그래도 나름 내조하며 현모양처로 살아갈려고도 애썼다.

남편의 성격이 모난건 시애미가 일찍 세상떴기때문이고 글씨는 못써도 글은 잘쓰니까... 

유모 못쓰게하는건 모정에 굶주렸던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이해할수도 있지,라고 마인드 컨트롤이라도 하지않았을까..

근데 드디어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터지고 한방 날릴만한 일이 생긴다.


“사유재산을 가진다는게 말이되나? 우리는 지금 농민들을 착취하는거야 난 재산을 모두 환원하겠어!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농부가 되는거야 날 따르라 소피아!”

“................ 이 죽일놈이 진짜.......”


그 후 쫓겨난 톨스토이는 객사한다.


지주생활을 청산하고,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었겠지만,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온(그나마 귀족같이 살지도 못했다, 고생만 하고) 소피아에겐 봉창두드리는 소리가 아닐수없다. 

그동안 악처라고 욕 많이 먹어왔었지만 소피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톨스토이도 결코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Posted by 쉬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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