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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역사에는 수많은 보물 도난 사건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호박방(The Amber Room) 사건은 그 화려함과 미스터리로 인해 오랫동안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습니다. 오늘은 이 전설적인 보물 도난 사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호박방의 탄생과 역사

 호박방은 18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된 예술적 걸작입니다. 원래 프로이센에서 제작된 이 방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호박(amber) 조각과 금박, 그리고 거울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예술 작품과도 같았습니다. 1716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에 의해 선물로 받아진 호박방은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궁(케서린 궁전)에 자리 잡으며,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문화 유산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도난 사건의 전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군대는 침공한 지역의 문화재를 약탈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1941년, 나치 군대는 러시아의 귀중한 문화 유산들을 목표로 삼으며 호박방도 그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호박방은 체계적인 약탈 작전의 일환으로 도난당했고, 이후 그 행방은 미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문화재 절도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국가의 정체성과 자긍심이 담긴 보물을 잃어버린 비극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건의 여파와 미스터리

 호박방의 도난은 단순한 범죄 사건을 넘어, 문화와 역사가 어떻게 전쟁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지를 상징합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호박방의 행방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그 존재 여부와 복원 가능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호박방이 아직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호박방사건은 전쟁 중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며, 오늘날 국제 사회가 문화재 보호를 위한 노력을 강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 잃어버린 보물, 잊혀지지 않는 유산

 호박방 사건은 단순한 도난 사건을 넘어, 문화와 예술, 역사에 대한 인류의 열망과 아쉬움을 대변합니다. 이 미스터리한 보물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그 실종 사건은 역사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유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호박방의 행방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지만, 그 이야기는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외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문화재의 소중함과 그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처럼 호박방 사건은 세계 역사 속 가장 큰 보물 도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며, 그 미스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미스터리한 보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생각과 의견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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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공황과 코로나 폭락: 두 경제 위기의 배경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2020년의 코로나 폭락은 모두 예상치 못한 충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공황은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서의 주식시장 붕괴로 촉발되었습니다. 당시 과도한 주식 투기와 경제의 불균형이 원인이 되었으며, 금융 시스템이 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면서 전 세계로 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반면, 코로나 폭락은 전염병이라는 외부 요인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경제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었고, 글로벌 공급망과 수요가 동시에 붕괴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 시장은 극심한 변동성을 보였고, 공포심이 투자 심리를 급속히 냉각시켰습니다.

 두 위기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시작되었지만,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위기의 본질이 외부 충격이든 내부적 문제든 간에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2) 금융 시장의 붕괴: 대공황과 코로나의 충격

 세계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과 코로나 폭락은 모두 금융 시장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1929년, 대공황은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주식 투자 붐이 정점을 찍은 뒤 시장은 과도한 투기의 부작용을 겪으며 붕괴했습니다. 은행들이 파산하고, 대출 자금이 마르면서 금융 시스템은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주가가 급락함에 따라 사람들은 은행으로 몰려들어 예금을 인출하려 했고, 이는 금융 위기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2020년 코로나 폭락 당시에도 주식시장은 전례 없는 속도로 하락했습니다. 팬데믹 초기에는 기업들의 수익 감소와 불확실성이 증폭되며 투자 심리가 급격히 위축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글로벌 주가 지수가 급락했고, 안전 자산인 금과 달러로 자금이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중앙은행들이 신속한 통화 정책을 펼치며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더 큰 붕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금융 시장이 경제적 충격을 흡수하는 데 실패하며 위기를 확대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대공황 당시에는 정부의 개입이 느리고 제한적이었던 반면, 코로나 폭락 시에는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빠르게 개입해 경제 위기를 완화하려 노력했습니다.

 

 

(3) 사회적 여파: 대공황과 코로나의 실업률과 빈곤

 세계 대공황과 코로나 폭락은 모두 사회적 여파로 심각한 실업률 상승과 빈곤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대공황 당시, 미국 실업률은 25%까지 치솟으며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공장과 기업들은 문을 닫았고, 농산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농민들조차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구걸하거나 무료 급식소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극도의 빈곤과 불안을 겪었습니다.

 코로나 폭락에서도 비슷한 사회적 문제들이 나타났습니다. 팬데믹 초기 봉쇄 조치와 경제 활동 중단으로 실업률이 급증했고, 특히 소규모 자영업자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2020년 미국 실업률은 단기간에 14.8%까지 증가하며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실업 수당과 긴급 재정 지원이 시행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가정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두 위기는 빈곤층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공황에서는 정부의 복지 체계가 미흡했지만, 코로나 시기에는 여러 지원 정책이 시행되면서 일부 완화된 점이 차이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충격은 경제 회복에 있어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4) 경제 위기의 교훈: 역사는 반복되는가?

 세계 대공황과 코로나 폭락은 두 시대를 초월해 경제 위기가 우리에게 남긴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먼저, 두 사건은 위기 상황에서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대공황 당시에는 금융 규제가 부족해 은행의 연쇄 파산을 막지 못했고, 이는 경제 전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면, 코로나 폭락 시에는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개입과 재정 정책을 통해 비교적 빠르게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교훈은 위기가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점입니다. 대공황은 빈곤층의 어려움을 극대화했고, 코로나 폭락은 소득 격차를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특히, 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금융 시장 회복으로 이득을 보았지만, 실직자와 소상공인들은 회복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제 위기는 미래를 대비하는 정책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대공황 이후 사회 안전망이 강화되었듯이, 코로나 폭락은 디지털 전환과 원격 근무 체계 등 새로운 경제 모델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각국은 위기에 더욱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는 반복될 수 있지만, 과거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대처 방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경제 위기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동시에 변화를 위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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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2007년 미국의 주택 담보 대출 시장에서 시작된 위기로, 신용도가 낮은 차입자들에게 대출이 과도하게 제공되면서 발생했습니다. 이 대출은 초기에는 낮은 이자율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이자율이 급등하며 차입자들이 상환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부실 대출은 대형 금융기관들의 유동성 문제로 이어졌고, 결국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금융 시장의 대격변을 초래했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전개 과정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2007년 중반 미국 주택 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위기가 점차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확산되며 심각성을 더해갔습니다. 초기에는 주택 가격 하락으로 인해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이 상환을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주택저당증권(MBS)과 부채담보부증권(CDO)에 투자한 금융기관들이 손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금융 상품은 고수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었기 때문에, 미국 내의 문제가 곧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2008년 들어 대형 금융기관들은 자산 부실화와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2008년 9월)은 금융 위기의 정점을 찍는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리먼 브라더스는 당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투자은행으로, 그들의 파산은 금융기관 간 신뢰를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이는 은행 간 대출이 멈추고, 기업과 소비자 대출이 급감하며 실물 경제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리먼 브라더스 이후 여러 대형 금융기관들이 연쇄적으로 위기를 맞이했으며, 미국 정부는 AIG, 모건 스탠리, 씨티그룹과 같은 주요 금융기관들을 구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구제금융 패키지를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금융 시장은 안정화를 찾기 시작했지만, 위기의 충격은 이미 전 세계 경제에 깊은 침체를 가져왔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주요 국가들은 공조를 통해 위기 대응에 나섰으나, 이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21세기 최대 규모로 평가됩니다.

 

 

금융 위기의 여파와 교훈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세계 경제에 심각한 여파를 남겼습니다. 주요 금융기관의 파산과 주식 시장의 폭락은 글로벌 경제 성장률을 급격히 둔화시켰습니다. 미국에서는 실업률이 급증했고, 주택 압류 건수가 기록적인 수준에 도달하며 일반 가계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와 함께 유럽을 포함한 주요 경제권 역시 금융 위기의 여파로 경제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일부 국가가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지며 경제 안정화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구제금융 패키지가 발표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TARP(Troubled Asset Relief Program)을 통해 은행에 직접 자금을 지원했고,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을 공급하며 시장 안정화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부채 문제를 심화시키고, 정부의 개입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위기는 금융 시스템의 투명성과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실 대출과 복잡한 금융 상품의 무분별한 거래가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금융 규제가 강화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도드-프랭크 법안(Dodd-Frank Act)이 제정되며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와 투명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위기는 단순히 금융권의 문제를 넘어 개인의 금융 습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은 저축과 자산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했으며, 투자자들은 리스크 분산의 필요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개인과 국가가 미래의 경제 위기에 대비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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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를 바꾼 허리케인 카트리나

 2005년 8월, 미국 남부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기억하시나요? 이건 단순한 폭풍이 아니었어요. 정말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하늘은 잿빛으로 변했고, 거대한 폭풍 구름이 도시를 덮으면서 모든 걸 삼켜버릴 듯 몰아쳤습니다.

 당시 풍속이 무려 280km/h라니, 말 그대로 ‘바람의 괴물’이었죠. 카트리나는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를 포함해 미시시피주, 앨라배마주까지 손을 뻗어 사람들의 일상과 도시를 흔들어 놓았어요. 그 흔적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이 허리케인은 자연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던 사건이었어요. 그럼 이제 카트리나의 거대한 크기와 엄청난 피해를 하나씩 살펴볼까요?

 

 

2. 거대한 허리케인의 위력

 카트리나는 정말 상상 그 이상이었어요. 보통 폭풍이라고 하면 바람이 좀 강하게 불고 비가 많이 오는 걸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이건 전혀 다른 레벨이었죠. 직경만 해도 약 640km에 달했어요. 이 정도면 한 나라를 덮을 정도의 크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카트리나가 가져온 풍속은 최대 280km/h. 이런 바람이면 자동차는 물론 건물도 견디기 힘든 수준이에요. 거기에 폭우와 해일까지 겹치면서 평소보다 해수면이 6~9m 이상 상승했죠. 이쯤 되면 뉴올리언스 같은 평지가 많은 도시는 완전히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카트리나가 휘몰아치던 그 시간 동안, 미국 남부는 마치 거대한 파도에 잠식당한 것 같았죠. 피해 규모는 정말 끔찍했어요.

 

피해 정도

인명 피해: 공식 집계로는 1,833명 사망, 실종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어요.

경제적 피해: 1,250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어요. 당시 기준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자연재해였죠.

주택 피해: 약 70만 채 이상의 주택이 파손되거나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도시 침수: 뉴올리언스의 80% 이상이 물에 잠겼습니다. 도시는 그야말로 거대한 호수로 변했어요.

피해 지역: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등 폭풍이 지나간 지역 대부분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결국 이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했는지 더 자세히 보고 싶으시죠? 다음 섹션에서 알아볼게요. 😊

 

 

3.  재난의 교훈과 회복을 위한 노력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단순한 폭풍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죠. 뉴올리언스는 마치 ‘거대한 호수’처럼 물에 잠겼고, 많은 사람들이 모든 걸 잃었어요. 그런데, 이 사건이 남긴 진짜 교훈은 따로 있어요.

 재난 이후, 많은 전문가들이 허리케인 피해가 이렇게까지 커진 이유를 분석했어요. 알고 보니 정부의 늦은 대응과 재난 대비 시설의 부족이 큰 역할을 했더라고요. 특히, 뉴올리언스의 방파제가 허리케인의 힘을 견디지 못하면서 피해가 더 커졌죠.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은 있었어요. 전 세계에서 구호물자를 보내고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피해를 복구하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하나둘씩 집을 재건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 재난은 기후 변화와 자연재해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어요. 기후 위기가 더 심각해지면 더 많은 ‘카트리나’가 나타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더 강한 대비책을 세우고,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답니다.

 결국,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단순히 파괴만 남긴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한 사건이기도 했어요. 우리도 이런 자연재해에 대비할 방법을 미리 고민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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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시리아 내전이 13년 만에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시리아를 20년 이상 통치해 온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반군의 공격을 피해 탈출을 시도하던 중 피살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사건은 내전의 양상과 중동 정세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의 전환점

 시리아 내전은 현대 역사에서 가장 긴 내전 중 하나로, 2011년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난민을 만들어냈습니다. 최근에는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라는 반군 조직이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주요 도시를 점령하며 정세를 급격히 변화시켰습니다. 여기에 더해, 시리아를 20년 이상 통치해 온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탈출을 시도하다 피살되었다는 소식은 내전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시리아 내전의 역사적 배경, 최근 사건의 전개 과정, 그리고 이로 인해 국제 사회와 중동 정세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다뤄보겠습니다.

 

 

시리아 내전과 알아사드 대통령 피살 사건

1) 시리아 내전의 시작과 지속된 혼란

 시리아 내전은 2011년 중동의 민주화 운동, 이른바 "아랍의 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를 강경 진압하며 내전으로 확산되었고, 이후 다양한 세력이 개입하며 전쟁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알아사드 정부: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반군 세력: 민주화 요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다양한 세력이 분열하면서 이슬람주의 세력인 HTS 같은 집단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국제적 개입: 미국, 러시아, 터키, 이란 등 외부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내전은 단순히 국내 문제를 넘어섰습니다.

내전은 경제적, 사회적 붕괴를 초래하며, 시리아 국민들은 폭력과 빈곤 속에서 고통받아 왔습니다.

 

2) 알아사드 대통령의 최후

 2024년 12월, HTS를 중심으로 한 반군이 수도 다마스쿠스를 장악하며 내전은 정점을 맞이했습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러시아로의 망명을 시도했으나, 반군의 대공미사일에 의해 전용기가 격추되었습니다.

피살 경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은 HTS의 성명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반군은 현장을 공개하며 정권의 종말을 선언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반응: 러시아는 알아사드의 죽음을 강하게 규탄하며 군사 개입을 예고했고, 서방 국가들은 반군을 지지하면서도 시리아의 안정화를 우려했습니다.

 

3) 사건이 가져올 파장

 알아사드 대통령의 사망은 내전 종식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혼란을 예고합니다.

반군 간의 갈등: HTS가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다른 반군 세력과의 충돌 가능성이 큽니다.

중동 정세 변화: 이란과 러시아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경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ISIS의 재등장: 혼란을 틈타 ISIS가 일부 지역에서 활동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의 국제적 여파

1) 중동의 힘의 균형 변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사망은 중동 정세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러시아의 영향력 약화: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 동안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중동 내 전략적 거점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러시아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란의 고립: 이란은 알아사드 정권의 주요 동맹으로, 시리아를 통해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정권 붕괴로 인해 이러한 연결이 약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터키와 이스라엘의 긴장 고조: 터키는 쿠르드족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세력의 영향력을 경계하며 공습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서방 국가들의 입장

 서방 국가들은 반군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환영하고 있지만, HTS의 이슬람주의 성향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됩니다.

미국: 시리아 내 ISIS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 추가 군사 지원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유럽 연합: 난민 문제와 인도적 지원을 확대하며, 새로운 시리아 정부와 협력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유엔: 유엔은 시리아 내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정치적 대화를 촉구하며, 반군 세력과 국제 사회 간 협력의 중재 역할을 맡고자 합니다.

 

3) 난민과 인도적 위기의 악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인도적 위기는 알아사드 정권 붕괴 후에도 여전히 심각합니다.

난민 문제: 주변국으로 피난한 67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본국 복귀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안정성을 제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큽니다.

경제적 붕괴: 시리아는 현재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상승으로 국민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구호 활동의 어려움: 국제기구들은 구호 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반군과 협상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 이후의 미래 전망

1) 새로운 정치 체제의 수립 가능성

 알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HTS의 주도권: 반군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인 HTS는 이슬람주의를 기반으로 한 통치를 시도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면 유엔과 주변국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정치적 대화와 포괄적인 참여가 필요합니다.

 

2) 경제 회복의 어려움

 전쟁으로 인해 시리아의 경제는 사실상 파괴되었습니다.

국제 원조 필요: 전쟁 피해를 복구하려면 대규모 재건 지원이 필요하지만, 반군 주도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의 과제: 석유와 농업 중심의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안정된 정부와 법적 체계가 요구됩니다.

 

3) 국제 테러 위협과의 연관성

 혼란 속에서 테러 단체들이 다시 발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ISIS와 같은 단체의 재부상: 시리아는 과거 ISIS의 본거지였으며, 새로운 권력 공백이 이를 부활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국제 사회의 감시 강화: 테러 단체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 국제적 정보 공유와 군사적 감시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4) 난민과 실향민 문제 해결

 약 670만 명에 달하는 시리아 난민과 국내 실향민의 귀환은 시리아 사회의 통합을 위한 핵심 과제입니다.

안전한 귀환 조건 마련: 귀환을 위한 안정성과 신뢰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재건을 위한 인프라 구축: 집, 학교, 병원과 같은 기본 시설의 복구는 난민 문제 해결의 필수 조건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도전

 시리아 내전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잔혹한 갈등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알아사드 대통령 피살 사건과 반군의 승리는 내전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지만, 동시에 시리아와 국제 사회가 직면한 과제는 더 크고 복잡해졌습니다.

 

시리아가 직면한 과제

정치적 안정화: 신뢰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고, 내전으로 분열된 시리아 사회를 통합해야 합니다.

경제 재건: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국제적 지원과 내부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인도적 위기 해결: 난민의 귀환과 기본 인프라 복구는 시리아 재건의 핵심 요소입니다.

 

국제 사회의 역할

 시리아의 미래는 국제 사회의 협력에도 크게 의존할 것입니다. 유엔을 비롯한 여러 국제 기구와 국가들은 인도적 지원, 테러 단체 억제, 그리고 안정적인 정부 수립을 돕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시리아의 역사는 고난과 회복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번 전환점은 시리아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성공하려면 시리아 내부와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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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구에 도래한 이후 수많은 생물이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든,간접적으로든 멸종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빅토리아 호수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이 초래한 최악의 대량 멸종 사태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에는 세 개의 대호수가 있다.

 

탕가니카호,말라위호,그리고 빅토리아호.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빅토리아호.

 

길이 337km, 둘레 3440km에 달하는 아프리카 최대의 호수다.

 

 

 

 

 

위의 세 호수에는 시클리드(cichlid)라는 물고기가 서식한다.

 

시클리드들은 호수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제각기 다양한 모습과 색채로 진화하며 단기간에 수많은 종으로 분화되었다.

 

 

 

(말라위 호수의 시클리드)

 

 

 

(탕가니카 호수의 시클리드)

 

 

빅토리아 호수의 시클리드는 크게 번성하여 한때 300종 이상에 이르렀다.

 

 

비극은 아프리카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0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영국인들은 빅토리아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의 크기가 작고 상업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에 실망하였다.

 

좀더 많은 이익을 얻을 방안을 모색하던 중 한 물고기가 그들의 눈에 띄었다.

 

 

 

 

나일퍼치(Nile perch)

 

최대 2미터에 200kg 이상의 크기로 성장하는 아프리카 북부 원산의 초대형 육식어다.

 

쏘가리나 꺽지와 같은 담수 농어목 어종들의 맛이 뛰어나듯이 나일퍼치 또한 훌륭한 맛을 자랑했고

 

거대한 몸집은 대량의 고기를 제공했다.

 

 나일퍼치를 이식하는 데에는 생태적 문제로 영국 내에서도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그러나 결국 찬성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마침내 어린 나일퍼치들이 빅토리아 호수에 방류되었다.

 

 

 

나일퍼치는 우간다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호수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클리드에게 전례없는 재앙이었다.

 

어떤 시클리드도 이 괴물같은 물고기에게 대적할 수 없었고

 

나일퍼치는 엄청난 크기로 성장하며 수많은 시클리드들을 빨아들이듯이 먹어치웠다.

 

 

 

 

 

 

 나일퍼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시클리드의 개체수는 급감하였다.

 

시클리드가 사라지면서 빅토리아 호수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식성의 시클리드들이 사라지자 조류와 수초가 맹렬하게 번성하였다.

 

과도하게 성장한 수초는 썩으면서 바닥을 두껍게 뒤덮었고 곧 바닥이 부패한 뻘로 가득차 아무것도 자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녹조류가 대량으로 증식하며 산소를 소모하여 호수의 물을 썩게 만들었다.

 

 

 

 

 

육식성 시클리드들도 자취를 감췄다.

 

모기 유충을 잡아먹는 육식성 시클리드가 사라지자 모기가 번성하며 주변에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1990년대 후반이 되자 빅토리아 호수에서는 시클리드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최소 200종 이상의 빅토리아 시클리드가 멸종했다.

 

전 지구를 통틀어 오직 빅토리아 호수에서만 서식하던 어종들이었다.

 

먹잇감이 사라지자 나일퍼치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수가 감소했고 굶주림으로 인해 크게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한때 크게 호황을 누렸던 나일퍼치 어업은 몰락하였고

 

빅토리아 호수의 생태계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작은 토착종 초식성 새우 caridina nilotica.

 

이 새우는 용존산소농도가 극히 낮아진 빅토리아 호수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현재 빅토리아 호수에 남아있는 나일퍼치 중 상당수가 이 작은 새우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시클리드를 주 대상으로 하던 주민들의 어업은 붕괴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에 곤란을 겪고 있다.

 

호수가 썩어가면서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수인성 질병과 피부병이 급증했고

 

탄자니아 정부는 UN과 환경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해결하고자 애쓰고 있다.

 

 

 

 

빅토리아 호수의 나일퍼치를 완전히 제거하고 호수를 예전처럼 되돌리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지금 황폐화된 빅토리아 호수에서는

 

살아남은 극소수의 시클리드들이 나일퍼치의 위협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두운 미래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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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쉬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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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제버거의 몰락

사건 2015. 8. 1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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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66억원 매출 달성(매장 100여개) 해외 매장 개설, 주식 우회상장 등 사업 확장에 몰두

 

2011년까지만 해도 크라제버거의 위상이 지금과 달랐음.

이랬던 브랜드가...

 

 

 

해외 매장, 장사가 안 돼서 망함.

의료업체 지분을 사서 우회상장하려 했으나 의료업체 소액주주 반발로 무산.

치킨 브랜드, 커피 브랜드 등 세컨드 브랜드를 여럿 만들지만, 치킨이고 커피고 이미 레드오션이라 망함!!

 

납품받는 햄버거 패티값(30억)을 못 내서 사옥을 경매로 팔아치움.

 

손실을 메꿔보려고 홈쇼핑에 반조리 상품을 내놓음(크라제 햄버그스테이크).

처음에는 제법 잘 팔렸지만 가면 갈수록 그 상품의 한계가 드러나 매상이 줄어들고 브랜드 가치하락!!

 

 

2013년, 영업손실 33억원. 부채 143억원. 자본잠식상태.

매각을 시도했으나 안 팔려서 기업회생 들어감

 

가맹점, 직영점 대거 폐점(2014년 9월 현재 매장 40여소)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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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쉬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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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치사한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를 무시할 때, 재수없기를 바랄 때 엿먹어라! 뻐큐먹어라!라는 말을 쓰곤 한다.


근데 왜 하필 다른것도아니고 '엿'이 이 욕에 포함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1964년 12월 7일 중학교 입시 복수정답사건 에서 유래된것이다.


 

 


1964년 12월 7일에 치러진 1965학년도 전기 중학입시의 공동출제 문제 中

 

 

 


18)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① 디아스타아제 

② 꿀 

③ 녹말 

④ 무즙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정답을 1번이라고 발표했지만, 1점차이로 떨어진


학생의 학부모들은 검정교과서에 실린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아제가 들어있다.'

 

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12월 8일 복수정답을 인정했지만,

 

복수정답으로인해 떨어진 1번정답학생의 학부모들이 반발하여 12월 9일 다시 복수정답이 번복된다.



 

 


화가 난 학부모들은 소송에서 승리하지만, 기사1면 날짜를 보다시피 6월에 판결이 나게 된다.


판결이 승소가된건 꽤 일찍 일어난 일이지만 교육당국이 중도입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서로서로 미루기만하면서 판결문 발표가 늦게 일어난것. 


그러다보니 이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있던 중 있던 사건이 바로


 


 


법원에 빅엿을 선사한 학부모들의 엿먹어라! 사건이다.


다수의 피해자가 생긴 사건에 처리가 계속 미뤄지니 학부모들이 직접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법원에서 뿌린 사건이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사실은 이 일을 이끌어낸 장본인들인

 

청와대 비서관, 문교부차관, 보통교육국장, 서울시교육감, 학무국장 등이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자녀나 친척을 유명중학에 '뒷문입학' 시켜버린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이 커지고 피해자의 불만이 속속들히 일어나 귀찮아지던차에

 

이런 비리까지 밝혀지니 열불이 난 박통은

 


 



싹다 짜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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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쉬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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